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티브 커 (문단 편집) == NBA 선수 시절 == ||<:>[[파일:external/assets.nydailynews.com/kerr1-web.jpg|width=320]]||<:>[[파일:external/images2.fanpop.com/Steve-Kerr-s-winning-shot-chicago-bulls-8856241-485-777.jpg|width=300]]|| ||<:><#d4001f> {{{#ffffff '''시카고 불스 시절'''}}} ||<:><#d4001f> {{{#ffffff '''[[1997 NBA 파이널]] [[유타 재즈]]를 상대로 위닝 슛을 성공시키는 모습'''}}}|| 현역 시절에는 191cm(6-3)의 삐쩍 마른 백인 포인트 가드이자 [[3점 슛]] 스페셜리스트였다. 1번으로는 키가 비교적 큰 편이었지만 팔도 짧은 편인데다가 체격도 빈약하고[* [[레지 밀러]]가 Little Stevie spot-up이라고 지칭하는 등 작은 이미지가 있지만 191cm는 PG로서 상당히 큰 키이다. 1번 중 최상위급 체격을 지녔던 [[제이슨 키드]]나 [[데론 윌리엄스]]와 같은 키고, 특히 80년대는 알빈 로버트슨이 193CM키로 슈팅가드로서 리그최강급 수비력을 보여주거나 같은 키의 데니스 존슨도 PG에서 출전하면서 2번 수비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커는 저 좋은 신장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는 운동능력 때문에 NBA기준 피지컬이 거의 최하위급이었다.] 운동능력도 매우 떨어져서 커리어 내내 주전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오직 3점 슛 하나로' 그 험한 NBA에서 10시즌 넘게 살아남은 선수이다. 여담으로 상당한 깡다구와 클러치타임에 주저않고 슛을 날려 경기의 판도를 바꾸는 강심장이기도 했다. [[시카고 불스]]의 2번째 [[쓰리핏]] 당시 [[마이클 조던|조던]]의 팀 메이트로 많이 알려졌으며 시카고 왕조에서 2대 궁병대장[* 1대 궁병대장은 [[존 팩슨]] 現 [[시카고 불스]] 단장이다. 두 선수 모두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 겸 3점 전문 슈터. 다만 존 팩슨은 첫 두번 우승까지는 주전이다가 1993년에 [[B.J. 암스트롱]]의 성장과 본인의 노쇠화 때문에 백업으로 밀려난 것이라 평생 후보였던 커보단 훨씬 나은 선수. 물론 그래봤자 평범한 선수였던 건 마찬가지라 1991년 기준으로 "NBA 주전 [[포인트 가드]] 중 가장 낮은 연봉을 받는 선수"기도 했다.]이자 시카고 불스 2기의 키 [[식스 맨]]이었다. 조던이 어시스트 해준 [[1997 NBA 파이널|1997 파이널 샷]]을 쏘기도 했다.[* 우승하고 시카고에서 열린 팬 행사에서 당시의 파이널 샷에 대해 "종료 25초 전 타임아웃에 들어갔는데, [[필 잭슨|필]]이 [[마이클 조던|마이클]]에게 마지막 슛을 쏘라고 했어요. 그러자 마이클이 '필, 전 이런 상황이 부담되는데, 이번엔 좀 다르게 가보는 건 어떨까요? 스티브에게 맡기죠.' 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 속으로 '내가 또 마이클을 구해줘야겠네.' 라고 생각했죠. 어쨌든, 슛은 들어갔고, 이건 제 이야기입니다. 전 이렇게 기억하고 싶어요."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 당시 스티브 뒤에서 박장대소하고 있는 마이클 조던의 표정이 일품이다.][* 이처럼 입담이 좋은 선수라 은퇴후 한동안 해설자로 일하기도 했다. 전설적인 NBC/TNT의 캐스터 마브 알버트와 콤비를 이뤘는데, 이 콤비는 NBA 게임인 NBA 라이브에도 목소리로 출연했으며 티맥 타임을 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98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 당시에도 큰 거 한방 날렸는데, 시카고가 4쿼터에 지고 있다가 맹추격을 하던 막판에 경기를 동점으로 만드는 3점 슛을 적중시켰다. [* 이를 그냥 넘길리 없는 커는 역시 우승 후 팬 행사에서 "흠... 3점 슈터가 동점을 만들기에 좋은 상황이군, 이라고 생각해서 필(잭슨 감독)에게 그렇게 말했죠. 그러자 필은 역겹다는 듯이 '스티브. 솔직해지자고. 작년(위닝샷)은 뽀록이었어. 마이클한테 공 주고 꺼져있어(stay out of his way)'라고 하더군요. 제가 정말 훌륭히 꺼져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농담을 던졌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나 [[애리조나 대학교]]로 진학한 커는 대학생 당시 1986년 [[FIBA 농구 월드컵]]때는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미국팀이 순수 아마추어 팀으로는 마지막으로 농구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당시 미국 대표팀으로 [[데이비드 로빈슨]], NBA 최단신 선수 먹시 보거스, 샌 안토니오의 올스타 SF로 대학팀에서도 팀 메이트였던 숀 엘리엇, 요즘은 방송인으로 더 유명한 [[케니 스미스]] 등이 선발되었다.] 1988년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NCAA]]에서 파이널 포까지 오르기도 했다. 1988년 대학 졸업 후 피닉스 선즈에 2라운드 지명을 받아 데뷔했지만, 입단 당시 케빈 존슨이라는 명 포인트 가드가 피닉스의 주전 포인트 가드였기에 백업으로써 큰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이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트레이드 되었지만 거기에도 [[마크 프라이스]]라는 캡스의 레전드 포인트 가드가 주전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기에 프라이스의 백업으로 지냈고 1992-93 시즌 또다시 올랜도 매직에 트레이드 되었을때는 2015-16 시즌 올랜도의 감독을 맡고 있는 스캇 스카일스가 주전 포인트 가드였기 때문에 계속 백업으로만 뛰었었다.[* 사실 누가 주전이냐를 떠나 그는 애초에 백업정도의 실력 밖에 되지 못했다. 어느 팀에 가서도 주전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카고는 포인트 가드의 역할이 제한적인데다 3점 슈터의 역할이 중요한지라 (이 때문에 딴 팀에선 주전감이 아니었던 존 팩슨이 전성기를 보냈다) 커가 시카고에서 전성기를 보냈는데, 이조차도 경기당 20분 정도의 후보였다. 볼핸들링이나 패스는 나쁘지 않고 경기이해도도 높은 편이나 주전으로 리딩을 할 수준은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갸냘픈 체격과 느린 발로 수비가 너무 약했다. 3점 슛이 중요한 현대에 와서도 주전은 무리인 선수. 또다른 역대급 슈터인 커리와 득점력을 비교하면, 커리는 얇은 체격 외에는 볼핸들링과 다양한 득점기술을 지녀 언제든 고득점을 퍼부을 수 있는 선수지만, 커는 슛'''밖에''' 없었다. 이러니 받아먹기만 할 수밖에. 물론 커도 NBA선수니까 돌파 후 득점이나 풀업 점퍼 능력 자체는 있지만 NBA평균에 비해 훨씬 후달렸다는 의미니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 커도 풀업 점퍼한적 있는데?"하지는 말자.] 그런 평범한 백업멤버였던 스티브 커 농구 인생의 전기가 된 것은 1993년 [[시카고 불스]] 입단. 비록 [[마이클 조던]]이 야구로 외도를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팀은 어려웠으며 여전히 주전 포인트 가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트라이앵글 시스템이라는 포인트 가드 1명의 패싱이나 개인기에 의존하지 않는 팀 전술, 그리고 1994-95 시즌부터 3점 슛 라인의 거리가 짧아져 3점 슛의 전술적 가치를 알아챈 NBA팀들이 적극적으로 3점 슛을 던지는 변화의 수혜자가 되면서 출장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시카고 불스 궁병대의 2대 궁병대장이 된다. 조던이 돌아온 시카고에서는 클리퍼스의 스타였지만 무릎부상으로 하락세였던 [[론 하퍼]]의[* 한때 평균 20점을 상회하던 스코어러였지만 시카고에서 뛸때는 (조던 합류 전부터) 이미 득점이 한자리수로 줄어있었다. 하퍼는 슛거리가 짧지만 폭발적인 운동능력으로 득점하는 슬래셔였는데, 운동능력이 사라지니 득점력도 사라진 것.] 백업이자 키 [[식스 맨]]으로 조던과 [[스카티 피펜|피펜]]이 만들어주는 3점 슛 찬스를 칼같이 받아먹는 궁병대장으로 활약하며 커리어 처음으로 100개 이상의 3점 슛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며, 위 짤방에 나오는 1997 파이널 6차전 승부를 결정짓는 슛을 성공시키며 3개의 반지를 손에 넣는다. 또한 이전까지 커는 경기당 출장시간 20분이 넘은 적이 한 번 밖에 없었는데, 시카고에서 보낸 다섯 시즌 모두 20분을 넘겼고, 커리어 하이 8.6점 역시 시카고에서 찍었다. 시카고 왕조가 해체되면서 그가 향한 곳은 [[샌안토니오 스퍼스]]. 하락세였던 33세에 이적한 것이라 더이상 팀의 중심적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1998-99 시즌 샌안토니오의 궁병대원으로 활약하며 NBA에 역대 세 명밖에 없는 팀을 옮겨 가며 [[3-peat]]에 성공한 선수 중 1명이 된다.[* 한 명은 1951년 로체스터 로열스, 1952년~1954년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에서 우승한 프랭크 사울이며 다른 한 명은 2017년~2018년 커의 지도 하에 우승을 차지하고, 2019년 토론토 랩터스의 일원으로 커의 골든스테이트를 꺾고 우승을 거머쥔 [[패트릭 맥카우]]이다.] 선수생활의 황혼기인 2002-03 시즌 샌안토니오에서 커리어 5번째 우승반지를 획득하고 은퇴를 하게 된다. [* 커의 농구인생에서 가장 큰 하이라이트는 위의 1997년 위닝샷과 이때 댈러스를 상대로 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에서의 활약이었다. 당시 커는 은퇴를 앞둔 노장으로 플레이오프 내내 출전이 없었다. 그러나 승부사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팀이 지고 있는 상태에서 베테랑 커를 과감히 투입했는데 그는 [[3점 슛]] 네 개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팀의 역전승에 크게 공헌한다. 이 외에 스티븐 잭슨, 마누 지노빌리 등이 활약하며 샌안토니오는 난적 댈러스를 꺾고 결승진출에 성공.] NBA 통산 [[3점 슛]] 성공률 45.4%로 역대 1위 선수이며 한 시즌 3점 슛 성공률 2위 기록도 가지고 있다. (52.35%, 1994-95 시즌)[* 한 시즌 3점 슛 성공률 1위는 2009-10 시즌 [[카일 코버]]가 기록한 53.6%] 사실 커가 현역시절 성공시킨 거의 모든 슛은 수비가 없는 사이에 패스를 받아 넣은 받아먹기슛인데다가 갯수가 적어 은근히 폄훼되기도 하는데, 커처럼 벤치에서 출장하며 슛시도가 극히 적은 선수가 고감도 슈팅력을 커리어 내내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NBA선수들도 사람인만큼 컨디션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이 경우 공격을 하면서 슛감을 되찾는다. 그런데 커처럼 수비, 리바운드도 못하고 리딩도 그렇고 좋지 않아 존재의의가 오직 슛에만 있는 선수들은 이런 식으로 슛감을 찾는게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슛 쏘는 기계"가 되어 '''투입 즉시 고감도의 슈팅력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댈러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그는 내내 못 뛰어 슛감이고 뭐고 없는 상황에서 '''딱 3점 슛 네 개만 던져 네 개 모두 성공시키는''' 극강의 효율을 보였다. 게다가 스티브 커는 1992-93 시즌에 팀을 옮기며 출장시간과 슈팅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을때와 말년을 제외하면 시즌 3점 슛 성공률이 4할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또한 그는 5할 성공률을 세번이나 기록했는데, 전체적으로 3점을 많이 쏠 수록 성공률이 높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커리어 통틀어 경기당 3점갯수가 가장 높았던 시카고 시절 성공률은 47.9%로 시카고 커리어에서 가장 높았으며, 클리블랜드 시절에도 3점을 가장 많이 쏜 1989-90 시즌에 50.7%로 성공률이 가장 높았다. 슛 시도수가 더 많았다면 지금보다 성공률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측되는 부분. 또한 상당히 강심장이라 필 잭슨이 다름아닌 '''마이클 조던을 제치고''' 위닝샷을 맡기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1997 파이널 6차전에서 위닝샷이 더욱 대단한 것이 4차전에 이미 잭슨은 커에게 경기 막판에 스코어를 역전시킬 수 있는 슛기회를 줬는데 커가 이걸 놓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차전 종료 직전에 마이클 조던이 자신에게 더블팀이 오면 커에게 패스하겠다고 말하자 지체하지 않고 "내가 대기하고 있을테니까 패스해줘!"라고 자신감 있게 나섰고 조던이 예상대로 더블팀을 당하자 패스, 위닝샷 기회를 맡기자, 이를 멋지게 적중시켰다. 피지컬이 워낙에 심하게 떨어져서 그렇지 멘탈이나 슈팅력은 챔피언으로서 손색이 없는 선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